서평, 영화감상

실존주의를 넘어서려고 한 철학자- 미셸 푸코의 발자취를 따라서③

밤하늘의별빛 2022. 7. 30. 10:32

책제목: 미셸 푸코, 1926~1984

 

3부는 투사 그리고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이다.

나는 이부분 특히 별세하기 전의 내용을 보고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푸코가 담담히 세네카를 읽으며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모습이 연출되서

마치 오래된 이를 떠나보내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지 출처: wordrow.kr

3부에서 소개할 주요 책은 감시와 처벌이다.

중요한 문장들을 집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감옥은 이 감시 사회의 교육수단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감시와 처벌속 역자 서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p15

<<감시와 처벌>>은 인간의 자유를 신장시켰다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오히려 이 시대가 과거의 군주적 형벌사회와는 다른 규율사회를 만들어 냄으로써

개인에 대한 권력의 감시와 통제를 강화시켰다는 논리를 창출한다.

 

푸코는 너무 유명해졌다. 이 구절이 웃긴데 같이 공유하고자 한다.

이미지 출처: https://meeco.kr/index.php?mid=humor&m=0&page=960&document_srl=25108549

 

p397

다음 날 푸코는 클로드 모리악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제 저녁 늦게 남아 있다가 그 거리의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들어갔는데

누군가가 ‘저기 장 폴 사르트르가 있다’고 소리를 질렀어.”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게 칭찬인지 어쩐지 나는 잘 모르겠어.”

 

푸코는 1부에서는 거의 뭐 INTP형 천재처럼 친구가 거의 없고 괴팍한 것으로 묘사됐지만

교수 재직 시절의 그는 여느 인간처럼 우정을 나눈다. 그 중 한 사람이 들뢰즈이다.

1971년 푸코가 감옥정보 그룹을 창설했을 때 들뢰즈가 합류했다. 즉 철학으로 맺어진 우정이다.

하지만 더 끈끈해진 우정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p436

들뢰즈와 푸코는 1977년에 프랑스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클라우스 크로이산트의 범인 인도에 반대하여 함께 투쟁을 벌였다.

물론 들뢰즈는 친소비에트적, 푸코는 친미국적이었기에 불신이 있기도 했다.

 

그는 철학 이외에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사건 1. 프랑코 독재정부가 11명 투사들을 처형하도록 내버려둘 때 선언문을 극좌 친구들과 함께 읽고 시위함.

사건 2. 1979620일 보트피플을 돕기 위해 사르트르와 만남+선언문 낭독

p477

사회의 행복을 책임진다는 미명하에 모든 나라 정부들을 자신들의 결정이 야기한, 그리고 자신들의 태만이 허용한

사람들의 불행을 손익계산으로만 따지는 권력 남용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정부가 독점하고자 하는 현실 속에 개인들의 위리를 새겨 넣읍시다.

 

또한 그는 르포르타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Q. 르포르타주가 무엇인가요?

영화·신문·방송·잡지 등에서 현지로부터의 보고 기사·사회적인 현실에 대하여 보고자의 주관을 섞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재의 생생함과 박진감이 특징이다. 형태는 신문 기사와 문학과의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사실만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학과 차이가 있다.

(출처: 위키백과)

 

p481

이 르포르타주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분석이 현장에서 실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분석과 깊이 연결될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념과 사건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기자들과 함께 작업을 벌일 것이다.

그는 민주화 관련 위원회의 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성명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거기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란 수도인 테헤란 취재를 하기도 했다.

신념과 실천 모두 중요하게 생각한 그가 바로 진정한 지식인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p513

왜 푸코와 사회당 정부의 관계는 그토록 악화되었는가?

그가 폴란드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자 또다시 청원서 서명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좌익이라 할지라도 여하튼 권력에 대한 그의 ‘드잡이’였던 것이다.

 

푸코는 미국과 가장 강렬한 관계를 맺었다.

근데 이걸 웃어야될지 말아야될지 모르겠는데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비자 담당관의 질문에 라고 대답해서

비자를 받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도서관에서 책도 많이 읽고 강의도 열심히 했으며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죽음이 점점 다가오자 그의 영혼을 대변하던 글쓰기의 스타일도 달라졌다.

p577

그의 마지막 두 권에서 푸코의 글쓰기는 많이 변했다.

좀 더 조용하고 열정이 없어졌으며 ‘침착’해졌다고 모리스 블랑쇼는 말했고, 훨씬 간결해졌다고 질 들뢰즈는 말했다.

거의 중성화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그 옛날의 ‘타는 듯한’ 글쓰기, 불꽃 같은 문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푸코는 드레이퓌스, 라비노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인의 인생의 모두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pixabay

이미 대철학자 푸코는 별세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리고 푸코를 사랑하는 모든 이의 삶에 푸코가 녹아져 있을 것이다.

푸코 선생님. 저의 영혼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철학의 위대함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히 쉬시고 앞으로도 다양한 사상들을 공부해서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