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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왜 플라톤에 열광할까?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다.”
플라톤 하면 떠오르는 것.
이데아, 유토피아, 펠로폰네소스 전쟁.
어떤 큰 사건들이 생기면 그에 따른 해석으로
거대한 철학이 등장하는데 이때 플라톤이 등장한 것 같다.
플라톤의 철학을 보면 굉장히 눈에 잡힐 듯 못할 듯한 개념들로 가득하다.
본질주의 철학자들이 흔히 그렇듯.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영향을 받은 개념 중 하나는 이것이다.

미적분 I에서 극한의 값이 수렴하거나 확산(확산 중에서도 규칙이 있는 확산과 없는 확산이 있음)한다는 개념이 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용주의가 극한으로 가면 결국엔 동질한 것들 중에서도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는 공동체사회(혹은 국가)에 혼란을 준다”고 하였다. 즉 개념정의가 확실히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철학은 크게 보면 간단하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즉 이분법적 사고이다.

플라톤의 사상을 보면 이상하게 페르소나가 생각이 난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나’에 관한 페르소나인 것 같다. 껍데기 같은 페르소나.
한번 생각해 보아라.
누가 살면서 이데아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따위에 관심을 갖겠는가.
그렇지만 알게모르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열광한다.

자기소개서라던가

광고라던가

자기 PR이라던가

대통령 선거 포스터라던가...
그래. 나는 이분법적인 생각도 좋아하니까. 그게 편하니까.
플라톤 철학=껍데기 철학, 자기 과시 철학이라고 생각할래.
나는 처음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같은 철학적 질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결국엔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다..”
그냥 뻔한 대답이다.
하지만 어쩌면 플라톤의 철학을 통해서 자기PR을 배우던 내 껍데기를 먼저 예쁘게 채워야
사람들이 나에게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일까?
일종의 자기보호를 위한 철학인가? 먼저 내 스스로 가식을 채워서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냥 이데아, 정의, 유토피아니 뭐니 뜬구름잡는 소리에 신물이 나서 뻘글 그냥 써봤다.
아테네사람들도 연설가, 말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지금도 글 잘 쓰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은 유튜브, TV, 언론 등에 많이 있다.
그러고보니 가식이 꼭 나쁜 건 아니지.
가식을 통해서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는 일을 최소화할 때도 있고... 뭐 그냥 그래.
그래도 정신승리 하나 하자면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지.
때로는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때도 있지.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나 도와주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식을 만들고.
그 가식의 일종이 플라톤같은 이데아론인거지.
정의라는 추상적인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를 받게 하고
결국엔 내가 이익을 보거나 다른 사람도 이익을 보거나 하겠지.
어떤 개념에 의해서 이익을 보는 경우도 다르겠군. 공리주의 또는 칸트처럼 이성주의 이런거..
그래서 존 스튜어트 밀이 플라톤에 관심을 가졌나?
어떤 사람이 (가치 1)을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치 1)에 동의하거나 수긍했다.
(가치 1)은 그들의 사회적 합의이고 결국 (가치 1)의 부산물을 누가 더 먹는가에 따라 나뉠 수 있다.
경우 1: 소수의 사람들만 이익을 보았다. -> 소수만이 좋아하는 가치
경우 2: 다수의 사람들이 이익을 보았다. -> 다수가 좋아하는 가치
그런 것들을 고려해보았을 때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가치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랑, 평화, 자유, 아름다움, 정직 등...
만약 ‘사랑’이라는 가치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보았다.
개인주의들은 사랑이라는 것보다는 다른 가치를 추구할 것이다.
집단주의는 사랑이라는 가치가 소수들만 피해를 봤다면 ‘어쩌라고’하면서 사랑을 수호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가치를 그렇게 계산적으로 보다니. 역겨운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플라톤의 본질주의도 실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패배 때문에 생긴 영향임을 생각한다면
감히 누가 이익과 가치를 함께 고려하지 않겠는가?
결론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까.
플라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내가 생각하는 이데아’ 정도는 있어야 함을 깨닳았어.
설령 그게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말이야.
아 근데 진짜 이데아 꼭 만들어야 해???? 내가 뭐 돈키호테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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